9/2 기록 21.0975km 2시간10분 킬로미터당 6분11초
@17회 토요마라톤 뚝섬-강동대교 구간
인생 첫 하프 마라톤을 뛰게 됐다.
'하프 한번 뛰어볼까?'
친구인지 나인지 누가 먼저 입 밖으로 꺼냈는지 기억나지않는 객기.
그때까진 별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당일 아침, 마음은 분명 평온한데 몸이 긴장했나보다.
대회 시작 직전까지 화장실을 너댓번은 다녀온 것 같다.
친구 만나 대회장 가는 길, 마라톤 참가자 한 무리가 가벼운 몸풀기 런닝으로 지나간다.
흉내내 몇 미터 뛰어보다 다시 걷는다. '에이, 기운 빼지 말자.'
9시 10분쯤 출발.
코스 설명을 하고 단체로 간단한 준비운동을 하느라 레이스 출발은 예정보다 다소 늦었다.
시작은 여유롭다. 발걸음이 가볍다.
주변 사람들도 초반부터 체력안배를 하는듯 서두르지 않는다.
공기 선선하고 하늘 맑은 날이구나. 강가에는 수상레저를 나온 사람들이 꽤 보인다.
'끝나고 패들보드로 강 한복판에 나가 쉴까나?'
2km, 1/10쯤 왔다.
아침마다 뛰는 거리니까 이쯤은 괜찮다.
무리져 있던 사람들 사이가 슬슬 벌어진다. 친구 녀석도 앞에서 달리기 시작한다.
4km , 이제 1/5.
온 만큼 4번만 더 달리면 된다.
우리보다 10분 늦게 출발했을 10킬로 달리기 선두그룹이 몇명 지나간다.
10킬로는 확실히 체력과 속도 안배를 다르게 한다.
친구녀석은 멀어져 있다.
10km, 반 왔다.
아까부터 보이지 않게 된 친구가 10킬로를 지나 반환점을 몇백미터 남겨두고 보인다.
하이파이브!
반환점을 돌고부터 힘이 부쩍 달린다.
상류쪽으로 올라왔기에 반환점을 돌아서는 내리막을 기대했는데 그다지 그런 느낌이 없다.
방향이 바뀌자 간간히 열을 식혀주던 바람조차 사라졌다.
13km, 간간히 보급소에서 물컵을 들어 한모금은 입에 머금고 나머지는 머리에 뿌린다. 시원한 것도 찰라다.
반환점 전후 몇 킬로 구간에 그늘도 거의 없다.
그나마 비트로 위안을 주던 무선 이어폰도 배터리부족 신호를 낸다. 완충해왔을텐데...
OOkm, 이젠 몇 킬로인지 따져 기억할 여력이 없다.
힘들 때마다 혼자 스스로에게 박수를 친다. 화이팅, 화이팅, 멈추지말자.
문득, 엇그제, 바쁘다는 핑계로 동료의 부탁을 들어주지못한 일이 생각났다.
같은 날 꽤 늦은 퇴근길에 지친 표정으로 나서는 그와 마주쳤다. 출근하면 도울 일 좀 찾아봐야겠다....
자꾸 시선이 발끝을 향한다. 다행히 아직은 다리가 움직여주고 있는 걸 확인한다.
다리가 자동기계처럼 움직이고 나는 그저 얹혀 있는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그 놈의 객기 때문에 몸이 제대로 고생중이다. 몸 곳곳에서 올라오는 아우성을 중간에서 적당히 모른척하지 않으면 완주는 없다..
몸을 극한으로 몰아부칠 때마다 하나 둘 생각나는 건 살면서 포기했던 일들이다.
포기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비슷한 의식으로 살고 있을까? 더 행복했을까? 덜 행복했을까? 알 수 없겠지. 그 선택이 더 좋은 선택이었음을 증명하는 건 내 몫이다.
거의 다 왔다.
마지막 남은 오르막이라고 생각하고 고비를 넘긴다.
착각, 긴 오르막이 하나 더 있다.
오르막도 만났겠다 걷다 뛰다 하는 사람들과 앞치락 뒤치락 하다보면 이제 조금은 걸어도 될까 하는 유혹이 스믈스믈 올라온다.
호기롭던 2시간내 기록 목표는 레이싱 중반너머 온데간데 없어졌다. '달리기를 멈추지만 말자'는 오기만 간신히 붙들어 잡는다.
드디어, 결승선이 보인다.
초반 내리막에서는 으레 속도를 내었었다. 결승선이 보이는데도, 내리막인데도 후들거리는 다리로 지금 막판스퍼트는 무리다.
먼저 들어온 친구가 보인다. 사진을 찍어주려고 나오나보다.
그나마, 지친 다리를 달래 속도를 붙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두 손을 들고 밝은 표정을 짓는다. 사진빨 스퍼트.
결승선을 지나 걷는 순간, 그제서야 하반신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허리는 끊어질 것 같고 두 다리는 내 다리가 아니다. 온몸의 무게를 받아내 연신 밀어냈던 엄지발가락 관절마디는 뻑뻑하고 발톱들의 이음매가 헐거워진 느낌이다.
결승전에서 제공하는 미숫가루를 몇 잔 들이켰다. 저 주전자 한통을 다 마셔도 갈증이 가실지 모르겠는데 작은 종이컵이 아쉽다.
나보다 십몇분은 먼저 들어온 친구가 하프는 다시 안한다고 엄살을 떤다.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고.
'너 그런 소리 해봤자 분명히 또 뛰게 된다, 임마 '
ps. 이틀 뒤 월요일, 친구 녀석 또 다른 하프마라톤 프로그램을 구해왔다. 내가 뭐랬냐고. ㅋㅋ
